크루세이더 킹즈3, 전략 롤플레잉 게임의 마스터클래스
크루세이더 킹즈3, 전략 롤플레잉 게임의 마스터클래스
  • 진병훈
  • 승인 2020.09.11 15: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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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의 영웅 라그나르 로드브로크가 서프랑크 왕국의 파리를 약탈할 때까지만 해도 곧 생애 마지막 전투를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앵글로색슨의 왕국 중 하나인 노섬브리아 해안에 좌초되면서 엘라 2세와 접전을 벌인 그는 독사가 득실거리는 굴에 처박히면서 의미심장한 유언을 남긴다.

늙은 아비의 죽음을 알게 된 새끼 멧돼지들이 어떻게 꿀꿀거릴까?”

아버지의 죽음을 알게 된 아들 이바르, 할프단, 시구르드 등은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의 데인족 전사인 바이킹들을 연합해 앵글로색슨을 대규모 공격하였다. 출발은 아버지의 죽음이었지만, 실은 자원의 한계를 돌파하기 위한 정복 전쟁이었다.

그리고 당신은 이른바 이 노르드인의 분노에 맞서 새로운 영웅으로 거듭나야 한다. 8세기부터 시작된 이 지긋지긋한 약탈전을 끝내고 웨섹스 가문을 지켜내야 한다. 잉글랜드를 지켜낸 영웅 알프레드 대왕을 말하는 것이다. 영토의 지배권을 공고히 하고, 병권을 소홀히 다루지 말아야 하며 국내 정세와 문화를 위해서라도 학문에도 집중해야 한다. 바이킹에게 최종적으로 승리할 때까지, 그리고 그들에게 기독교로의 개종을 조건으로 내세우기까지 상당한 우여곡절을 겪을 것이다.

바이킹과 알프레드 대왕의 이 거대한 서사는 <크루세이더 킹즈3>에서 유기적으로 진행되는 이야기 중 하나에 불과하다. 이 대전략 롤플레잉 게임은 가상의 공간이지만 정치, 종교, 문화 등을 다수 섭렵할 수 있는 영광스러운 역사가 자리잡고 있다.

패러독스 인터렉티브는 그동안 역사 속의 캐릭터들을 등장시켜 그만의 역사 형성 환경을 구축시켜 왔다. <크루세이더 킹즈> 시리즈 역시 실존하는 역사를 가져와 다소 난잡한 궁정 드라마를 재현했다. 이 어마어마한 프랜차이즈를 경험한 게이머들은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결혼에 이은 왕조의 불화, 불륜 등 입에도 담을 수 없는 끔찍한 사건들이 통치자 주변을 끊임없이 기웃거린다. 게이머가 이런 불상사를 겪지 않으려면 배우자와 그 가족의 면면을 살펴봐야 한다. 그들의 종교와 문화, 동맹에 대해서는 어떻게 나올 것인지, 수태에 대해서는 긍정적인지, 그리고 가학적이거나 혹시 음탕하지는 않은지.

더 할 이야기는 많지만 일단 결혼의 목표가 계획대로 흘러가면 강력한 동맹을 구축함과 동시에 하나의 왕국을 통합할 수 있다. 대부분 이 게임을 땅따먹기로 인식하고 있지만, 실은 인물에 대한 심오한 탐구라고 할 수 있다. ‘심오하다고 해서 거창하게 볼 필요는 없다. 승계법을 개정하지 못한 채 통치자가 죽으면 가까운 형제들부터 영토를 빼앗고, 심지어 암살까지 시도하려 든다. 이런 막장 드라마에 익숙한 게이머들은 겁낼 필요 없이 문서를 조작하거나 작위를 강탈해서 도로 영토를 탈환할 수 있다. 손이 조금 바쁠 뿐이지, 마우스 클릭 몇 번이면 게이머가 원하는 결과를 언제든지 가져올 수 있다.

대전략 롤플레잉 장르를 처음 접하는 게이머들은 이제 머리가 복잡해질 것이다. 이 게임의 튜토리얼 후반부에 이제 어떡하죠?’라는 팝업 창이 뜨는 이유는 게이머가 이 거대한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편일 뿐이다. 아일랜드 왕으로의 도전은 인도와 중앙아프리카까지 끊임없이 펼쳐질 것이다.

이번 시리즈는 스트레스라는 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인물과의 상관관계를 더 확장하였다. 대부분 궁정 내의 갈등을 해결하면서 스트레스를 받는 경향이 있는데 캐릭터의 특성에 따라 압도당하기도 한다. 가학을 즐기는 통치자가 고문을 취미로 삼지 않는다면 그것이 스트레스로 돌아올 수 있다. 통치자의 운명을 결정지을 정도는 아니지만 새로운 막장 드라마의 길로 안내할 수도 있다.

사실상 크루세이더 킹즈에서 불가능한 이야기는 없다. 끔찍한 암살은 기본이고 근친에 가까운 패륜 행위에 식인 풍습을 화제에 올리거나 동성애를 허용, 가톨릭에서 여성만을 사제로 허용하는 등 듣도 보지도 못한 이단을 만들 수 있다. 게이머만의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주제를 만들어 나가는 동안 이 무한한 가능성은 비밀 탐색으로도 이어진다.

사실상 통치자를 국왕으로 이끌어 주는 자문회 중에는 첩보장이라는 자가 있다. 이들은 대부분 핏기 없는 얼굴로 망토를 걸치거나 단검을 쥐고 있는데 각 영토의 영주들을 상대로 비밀을 파헤칠 수 있다. 혼외정사나 불륜 등의 정보를 통해 협박하면 그만큼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데 본의 아니게 비밀이 폭로되면서 예상치 못한 스토리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협박과 조작, 순화해서 표현하면 명분을 쌓아 주는 일 역시 모두 인물들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일이다.

전투 시스템은 여전히 단순하고, 손이 덜 가지만 이후에 끼치는 영향력은 생각보다 상당한 편이다. 패러독스 인터렉티브는 강물처럼 흐르는 이 역사 속에서 수많은 인물들을 병들게 하거나 지치게 한다. 전쟁이라는 유혈 사태는 승패와 상관없이 자녀들과 형제들을 사망에 이르게 하거나 쇠약하게 만든다. 가장 가까운 친구나 배우자가 공성전 과정에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으며 이는 동맹 관계에서도 크나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생존자들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지만 게이머가 조종하는 아바타는 불안과 두려움에 가득찬 얼굴로 돌변한다.

3D 애니메이션 효과는 예상외로 효과가 있다. 이 방대한 캐릭터 모델링에 아무리 강력한 생명력을 불어 넣는다고 해도 게임성에 아무런 변화도 없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다. 원대한 포부와 야망을 지니고 마우스를 클릭했던 게이머는 이제 새치 머리와 주름이 가득한 통치자를 보게 될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의 자녀가 DNA를 물려받았다는 사실을 비주얼적으로 느끼면서 왕국 통합이라는 거사 앞에 조급해질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평민 복장부터 시작해서 비잔틴제국의 정교한 드레스, 국왕에 어울릴 듯한 화려한 모자와 왕관까지, 어쩌면 전쟁으로 인한 패배 때문에 흉터와 멍든 얼굴을 하고 있는 통치자의 초상화를 관망할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높은 점수를 주고 싶었던 부분은 간편한 인터페이스에 있었다. 그래픽 작업 도구를 보는 듯한 이 훌륭한 환경은 줌 레벨(확대/축소)’부터 효과를 발휘한다. 종이 지도가 부각되는 줌 레벨(축소)부터 지형의 상세한 부분이 드러나는 확대 클로즈업까지 바다와 지형 등의 설명이 매끄럽게 사라지고 나타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구릉지와 습지대, 삼림, 평야가 가시권에 접어들면 전투에 유리한 지점이 어디인지 금방 파악할 수 있다. 문화, 신앙, 가문, 더 나아가 영토 범위에 따라 켜기/끄기 버튼을 클릭하면 마우스 휠을 사용하지 않고도 대략적인 정보에 직관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궁금한 용어에 마우스만 갖다 대면 Q&A에 해당하는 설명이 팝업 창 형식으로 뜨게 되는데 물이 차오르는 듯한 비주얼이 끝나면 그 창은 고정이 되고 새로운 용어를 더해 알아나갈 수 있다. 전체적으로 색감은 어둡지만,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빠진 중세 시대를 적절히 표현하고 있다.

문제는 크루세이더 킹즈3와 같이 대전략 롤플레잉을 처음 접하는 게이머에게 있다. 이번 시리즈는 한글화가 된 덕분에 튜토리얼부터 느껴지는 재미가 상당하다. 영토를 구성하는 공작령이나 백작령, 직할령 등 어마어마한 양이지만, 이 생소한 용어의 설명을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처음 시작하는 게이머들은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다. 승계법이나 자녀들의 학업 문제 등 쉽게 지나칠 수 있는 문제들을 하나씩 겪어가며 털고 가야 하는데 이 게임의 마지막 튜토리얼처럼 이제 어떡하죠?’가 여전히 머릿속을 지배하는 것 같으니 언젠가는 갑자기 방전이 된 것처럼 멍한 상태가 될 수도 있다.

특히 전쟁이 숨바꼭질처럼 변질되어 버리면 새로 도입된 기사 시스템이 쉽게 허물어질 수도 있기 때문에 큰 낭패를 볼 수 있다. 내 금쪽같은 아들이 기사가 된 줄도 모르고 죽어 나갔는데 정신이 멀쩡한 통치자가 누가 있겠는가?(역으로 방해가 되는 후계자들을 처단하는데 이용하기도 한다.)

가장 큰 충격은 통치자가 나이 들어 죽는다는 점이다. 후계자를 제대로 교육시켜 놓지 않았다면 자문회부터 등돌릴 것이다. 큰 전쟁이라도 벌여 놓았다면 오히려 위기가 되고 가족들과 친구들이 다른 영토의 감옥 안에 갇힐 수도 있다.

하지만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이 게임은 배우자가 자녀만 잘 낳아 준다면 끝날 일은 없다. 아일랜드의 먼스터 왕국부터 터를 다지는 무르하드는 대중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혹여 게이머가 제대로 관리만 해준다면 무르하드의 워 브리아인가문이 오브 웨섹스가문처럼 들고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다. 876년부터 878년까지 바이킹의 침범으로 월프셔와 햄프셔의 대부분을 함락당하고 대패했던 알프레드 대왕처럼 전세를 뒤집지 못하리란 법은 없다.

크루세이더 킹즈3는 기존 시스템의 장점을 잘 이해했을 뿐만 아니라 깊이 있게 개선함으로써 이제는 대전략 롤플레잉 게임의 마스터클래스로 불릴 만하다. 이미 전 세계의 게이머들은 이 역동적인 전쟁 속에서 겪는 성취와 상실, 사랑과 배신, 막장 드라마를 눈앞에서 보기 위해 수천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 그들은 아마도 비슷한 시간을 앞으로도 보낼 것이고, 전설로 남을 국왕이 되기 위해 오늘도 노심초사하며 양피지 지도를 펼칠 것이다.

혹시 여러 차례 좌절을 겪어서 심신이 지친 게이머가 있다면 아일랜드 왕을 코앞에 두고 나이 들어 죽은 무르하드 소왕을 떠올리시라. 그는 충분한 돈을 모으지 못한 탓에 조건이 충족할 만큼 영토를 장악하고도 빛을 보지 못했다. 이런 불운한 통치자가 되지 않으려면 돈 관리도 잘해야 하지만, 주변 사람들을 잘 지켜봐야 한다. 특히 가족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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