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VOICE), 비주얼 노벨의 추억을 소환하기에는…

  • 입력 2021.12.27 16:58
  • 기자명 진병훈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스팀에 등록된 보이스(VOICE)라는 게임의 외형은 전형적인 비주얼 노벨이다. 연애 시뮬레이션의 전설로 통하는 동급생이나 도키메키 메모리얼시리즈를 기억하는 게이머들이라면 늘 비주얼 노벨이라는 장르 앞에서 최소한 한 번 정도는 가슴이 설렜을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비주얼 노벨이라는 장르가 흔한 기성품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라이브 2D’라는 소프트웨어로 미소녀 캐릭터들이 눈웃음을 치고, 어깨춤을 추기 이전부터, 이제 비주얼 노벨 게임은 스마트폰으로도 간편하게 즐길 수 있는 콘텐츠가 되었다. 저작권에서 자유로운 미소녀 캐릭터 포맷들이 제법 많이 나온데다, 그럴듯한 배경 그림과 오디오까지 쉽게 삽입할 수 있다 보니, 이제는 PC나 콘솔 게임에서도 구경하기 힘들어졌다.

그런 면에서 보이스라는 게임의 시도는 반가웠다. 디스토피아를 소재로 한 어드벤처, 그것도 말하기가 금지된 세계가 배경이라고 하니, 조지 오웰의 ‘1984’나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떠오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사람의 신체 일부가 억압된다는 면에서 눈먼 자들의 도시그리고 여자들은 침묵하지 않았다가 오버랩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게임을 플레이해 본 결과, 내가 너무 앞서간 것이었다. 비주얼 노벨이라는 장르를 떠나서 어드벤처와 디스토피아 장르가 던지는 메시지에 대해 약간의 혼란까지 생겼다. 디스토피아 장르를 영화와 게임에서 만나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즐길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아무리 1인 개발자의 테스트 성격이 강하다고 해도, 최소한 1분 정도는 실제로 디스토피아 세계에서 일어날 법한 일을 상상하지 않겠는가. 본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말하기가 금지된다면 크리스티나 달처의 아이디어처럼 카운트 기계가 사람들을 감시할 것인가? 아니면 빅 브라더가 모든 건물과 가정집에 설치된 텔레스크린을 통해 24시간 감시할 것인가? ‘순수운동’, ‘사상 경찰’, ‘신어’, ‘이중사고등의 상징적인 단어로 독자를 끔찍하게 만들 것인가?

안타깝게도 스팀에 등록된 보이스를 플레이할 마음을 먹었다면 위와 같은 개념들은 그냥 잊어 버리는 것이 좋겠다. 차라리 비주얼 노벨 장르의 추억을 조금씩 소환하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플레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먼저 고백하자면, 이 게임의 엔딩을 30분 안에 보게 됐다. 동공이 확장되면서 깜짝 놀랄 게이머도 있겠지만, 농담이 아니다. 나는 실제로 30분 안에 엔딩 크레딧을 보았고, 1인 개발자의 닉네임도 보았다. 그리고 메인 화면으로 넘어간 것을 보고, 솔직히 표현하자면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이미 그 전부터 이 게임의 장르가 디스토피아라는 장르가 맞는지 고심해야 했고, 언제부터 내가 디스토피아에 대한 끔찍한 상상을 할 수 있을지, 그 시기만 두고 보고 있었다.

30분 안에 엔딩을 보게 된 사연은 이렇다. 말하기는 금지됐지만, 이에 반발하는 시민들을 게임에서는 스피커로 표현하고 있다. 이 스피커들이 모인 곳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레지스탕스인데, 과격파도 아닌 합리적인 조직으로 묘사하고 있다. 주인공이 처음으로 이 조직과 접촉하면, 합류할 것인지 묻는다. 물론 합류를 묻는 과정에서 반대를 하면 기존의 삶으로 똑같이 살아갈 것이라는 경고를 던져 준다. 그런데 분기 지점이 이상하지 않은가? 합류할 것인지, 아니면 반대할 것인지 묻는다면 당연히 합류해야겠지만, 반대를 선택해서 예상되는 게 뭐가 있을까? 게임을 포기하려고 반대를 선택하는 게이머는 없을 것이다. 본인처럼 순수한 호기심이라면 모를까. 혹시라도 반대를 선택하면서 합류의 새로운 명분을 던져 주는 건 아닌지, 아니면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분기가 나오면서 합류의 계기가 생기는 건 아닌지, 기대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까 반대를 클릭한 건, 내가 게으른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경험을 위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30분 안에 엔딩을 보고, 메인 화면으로 넘어가면 더 황당한 일이 벌어진다. 이 게임은 자동 저장 개념이 없어서 중간중간에 저장을 해야 한다. 그 사실을 뒤늦게 파악한 탓에, 게임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화가 날 정도로 어이가 없는 건 아니었다. 레지스탕스와 처음 접촉하기까지 그렇게 긴 시간이 걸리는 것도 아니었고, 얼마든지 빠르게 진행이 가능하다 보니, 금방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상황까지 가다 보니, 이미 이 게임에 걸었던 기대감은 거의 흐릿해지기 마련이었다. 합류해서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스피커 중에 배신자를 찾아야 하고, 그 배신자를 찾을 인물로 주인공이 낙점된 건 이상하다 쳐도, 이미 합류할 것인지, 그 질문을 받을 자격부터 고개를 갸웃하게 한다. 게임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고등교육을 받았고, 성대 제거 수술을 받지 않았다는 점. 성대 제거 수술을 하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가고 있다는 끔찍한 표현이 나오고, 9개의 엔딩이 존재한다는 점이 반전 성격을 띠고 있지만, 이걸로 빅 브라더의 공포를 논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 게임의 진입 장벽은 의외로 피지컬에 있었다. 비주얼 노벨, 어드벤처 게임인데 이게 또 무슨 소리인가, 하겠지만 사실이다. 누군가를 자동차로 미행하는 미션은 이 게임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데, 플레이 시간은 의외로 많이 차지한다. 희한한 건 이 미션의 진행 방식이다. 자동차를 미행하는 미션이라고 한다면, 어떤 그림을 상상할 것인가? 엑셀과 브레이크, 속도를 올리거나 늦추거나 하면서 앞차가 눈치채지 못 하게 적절히 거리를 두는 것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 게임은 속도를 줄이는 ‘Decelerate’와 표준 속도의 ‘Standard’, 속도를 올리는 ‘Fast’, 과속으로 속도를 올리는 ‘Overspeed’, 총 네 가지로 나누어서 상황에 맞게 클릭하도록 했다. 그리고 앞차와의 거리를 계산해 놓고, 적당히 거리를 두도록 설정했다. 속도 방향을 네 가지로 나눈 것도 이상하지만, 알아보기 힘들게 배열한 것도 이상하다. 물론 난이도를 고려한 선택일 수 있지만, 문제는 그 내용에 있다. 게임은 앞차와의 거리를 적당히 두려는 것이 아니라, 간헐적으로 정확한 거리를 지시하고 있다. 앞차가 시야에 보인다고 해서 끝이 아니라, 아예 게임 자체가 끝이 나 버린다. 더 심각한 건, 앞차가 갑자기 속도를 바꾼다는 이유로 충돌하거나, 놓쳐 버리는 점에 있다. 피지컬 좀 한다는 게이머도 아마 이 부분에서 배드 엔딩을 심심찮게 볼 것이다. 본인 역시 진지하게 임한다고 했는데도 쉽지 않았다.

피지컬에 텍스트 분량을 많이 할애한 이유는 또 있다. 미행 미션에서 실패하면 바로 게임을 재시작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앞서 언급한 것처럼 배드 엔딩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게이머가 중간중간에 저장을 했다면, 바로 불러오기를 통해서 빠르게 재시작할 수 있다.

그런데 배드 엔딩이라니.

친절한 안내와 튜토리얼까지는 기대하지 않지만, 최소한 게이머를 쉽게 좌절시키는 일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몇 년 전에 누구든지 자유 연재 형식으로 비주얼 노벨 게임을 제작할 수 있다는 소식을 접한 적이 있다. 사용할 수 있는 미소녀 캐릭터, 배경 그림, 음성 파일 등을 공개하고, 독자들이 마음껏 제작할 수 있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게임을 접하면서, 몇 년 전에 구경했던 그 자유 연재 형식의 게임이 떠올랐다.

결론적으로 이 게임은 1인 개발진의 테스트 성격이 강하다. 해외 인디 개발진이 최근 제작한 게임들의 완성도와 비교한다는 건 솔직히 무리다. 자동 저장이 없는 게 실수라고 해도, 개발 화면이 보이는 버그 같은 게 초반부터 노출되는 것을 보면 19,000원의 가격도 개발진이 앞서간 것으로 보인다.

개의 댓글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