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러지 라이프(Sludge Life), 쓰레기 세계에서 펼쳐지는 그라피티
슬러지 라이프(Sludge Life), 쓰레기 세계에서 펼쳐지는 그라피티
  • 진병훈
  • 승인 2021.06.08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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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형화(Spherize)가 된 왜곡된 이미지와 VHS 톤까지 섞인 흐릿한 화면이 아주 지저분하게 움직인다. ‘Adult Swim’에서나 볼 법한 우스꽝스러운 캐릭터들이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만 되풀이한다. 이 엉뚱하고 기괴한 게임을 감당할 자신이 있다면 ‘슬러지 라이프(Sludge Life)’는 최소한의 킬링 타임은 보장해 줄 것이다. 시각적인 불편함을 감내하더라도 비트 섞인 사운드가 당신의 귀를 어느 정도 환기시켜 줄 것이다. 문제는 이 게임의 정체를 파악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린다는 것이다. 탐험 정신이 투철하지 않다면, 게임의 정체성에 대해 트집을 잡을 것이고, 금방 손사래를 칠 것이다.

VHS 시대를 경험해서 그런지, 어쩌면 창의적이고 개성적인 작품에 대한 갈망이 있는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슬러지 라이프의 첫인상은 흥미로웠다. 낯선 캐릭터들과 낯선 대사들, 이해하기 힘든 건축물의 각 구조들, 이 게임의 세계관은 그야말로 모든 것이 낯설었다. 몇 시간 동안 이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느낀 건 개발진이 80년대식 로파이(Lo-fi) 음악에 심취해 있으며, 미술에 대한 예술관이 매우 짓궂다는 것이다. 휘갈겨 쓴 낙서도 인간의 심정을 투영하는 것이라고 시위라도 하는 것 같았다.

개인적으로 그라피티를 소재로 한 게임이나 영화는 언제나 혼란스럽다. 해외에 태거(Tagger, 공공장소에 그라피티를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는 모르겠지만, 도저히 근접할 수 없을 것 같은 그들만의 세계관이 두려움을 안기기 때문이다. 전혀 낯선 세계에 발을 들이는 건 언제나 긴장이 되고,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만큼 이 게임 슬러지 라이프도 완전히 새로운 인상을 주고 있다.

슬러지 라이프의 게이머는 ‘GHOST’라는 태거로 활약한다. 컨테이너 안에서 깨어나 그 일대를 거닐다 보면 이 세상이 얼마나 오염되고, 지저분한 지 알 수 있다. 건축물 바닥 아래에는 모조리 ‘슬러지’로 덮여 있다.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일은 역시나 페인트를 분무기로 뿌려서 우스꽝스러운 그림 하나를 만드는 것인데, 이러한 작업이 총 100가지로 이루어진다. 그리 넓지 않은 이 건축물 안에서 배치된 분무기들을 찾아서 그림을 그리면 된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디테일한 상호작용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 전에 특정 NPC들과의 대화를 통해 단서를 찾아야 한다. 카메라, 글라이더, 워퍼, 낙서꾼의 눈으로 총 4개의 아이템이 있고, 위성과 ‘할 일 목록’을 찾는 것이 급선무라고 할 수 있다. 그 외에 슬러그들과 담배, 각종 CD들이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을 찾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는다.

문제는 이 게임이 1인칭 시점으로 3D 플랫폼을 지향한다는 점이다. GHOST가 착지할 수 있는 발판들이 게이머가 상상할 수 없는 지경까지 가다 보니 숨어 있는 아이템을 찾는 것이 마냥 쉽지만은 않다. 발로 밟고 올라가거나, 손으로 짚어서 올라갈 수 있다는 기존의 개념을 잊어 버리고, 어디든지 전진 키를 눌러서 발을 내딛을 수 있는지 시험해 봐야 한다. 단적인 예를 들어서 굴뚝이나 홈이 파인 벽도 스무드하게 올라갈 수 있다는 여지도 남겨줘야 한다.

그러다 보니 이 게임의 단점이 확연히 드러난다. 발판을 밟고 어디를 올라갈 수 있는지 특별히 고심할 필요가 없다 보니 플랫폼 장르의 매력이 희석되어 버리고, 발판 사이의 경계도 어디까지인지 가늠하기가 힘들게 된다. 대각선으로 쓰러진 컨테이너 위로 쉽게 넘어가거나, 높아 보이는 철망 위로도 가볍게 뛰어 넘어가 버리니, 점프해서 넘어가지 못 하는 곳이 있다고 하더라도 두세 번 더 테스트를 하다 보니 시간을 낭비하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시각적인 면에서 소홀한 감이 있다 보니 지리를 익히는 것도 쉽지가 않다. 그래픽 자체도 낙서를 한 것처럼 제작됐기 때문에 비슷해 보이는 구조물들이 자주 보인다. 물론 건축물의 구조들이 그리 어려운 건 아니라서 미로라고 여기기는 힘들지만, 위성 아이템을 통해 위치를 파악할 수 있어서 아이템을 찾는 일이 번거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이 게임의 시야 설정이 매우 불편했다. 아마 대부분의 게이머들이 플레이한 지 5분도 안 돼서 매우 어지럽다는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먼저 현미경이나 돋보기 안으로 들어와 버린 것처럼 왜곡된 영상이 눈에 들어올 텐데 마우스 감도까지 매우 거칠다 보니 설정부터 들어가는 게이머가 적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VHS 필터를 거치고, 화면을 마우스의 움직임에 따라 이리저리 꼬고 있어서 개발진의 장난이 매우 짓궂다는 느낌도 받을 것이다. 화면 자체도 흐릿하게 설정해 버렸기 때문에 사실상 해상도를 4K까지 올려도 별 의미가 없다.

다행히도 이 모든 것들이 설정에서 되돌릴 수 있기 때문에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VHS 필터나 화면을 꼬는 등 모두 ON/OFF 설정이 있어서 불편한 것들을 모두 반대로 해 놓으면 정상적인 게임 화면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개발진의 의도 자체가 기본 설정에 있기 때문에 ‘정상적인 게임 화면’이라고 언급하기도 애매하다.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설정을 꺼 버렸더니, 흥미롭게만 보였던 게임 전개가 다소 심심하게 느껴졌다.

이 게임은 엄밀히 오픈월드 장르라고도 할 수 있다. 글라이더 아이템을 획득하고 나면 높은 곳에서 얼마든지 낙하하면서 내려올 수 있는데 기괴하게 보였던 건축물 구조가 훤히 보이기 시작하고, 이전까지 느꼈던 답답함이 어느 정도 풀리면서 게임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앞서 언급한 분무기들이나 슬러그들, 보이지 않았던 캐릭터들까지 곳곳을 뒤지며 찾게 되면 어느새 준비된 엔딩 세 가지를 경험하게 된다.

‘할 일 목록’을 찾는 것이 그래서 중요하다. 게이머가 찾은 아이템들이 하나씩 메인 화면을 장식하게 되는데 포스트잇처럼 붙어 있는 ‘할 일 목록’을 클릭하면 게이머가 해야 할 일이 정리되어 있다.

그런데 이 게임의 엔딩을 보면서 성취감과는 무관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게임 자체에 암울한 느낌이 다소 섞여 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흐릿한 비주얼을 추구해서 그런지 모르지만, 기존 게임들처럼 짜릿한 쾌감이나 보람을 느낄 수는 없었다. 컨테이너 안으로 툭 던져 놓고, 분열성 물질의 작은 덩어리들을 찾아 나서야 하니, 게임 자체가 쓰레기 더미 속을 헤집고 다녀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게임을 즐길 마음을 먹었다면 다소 불안정해 보인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넘어가야 한다. 발판을 짚고 넘어가는 일은 여전히 불편하고, 체크포인트 개념의 워퍼도 정확한 위치를 찾아내는데 있어 명확한 설명이 부족하다. 또다른 문제라면 이 슬러지 라이프를 충분히 즐기기에는 건축물들이 그리 넓지 않다는 것이다. 플레이타임이 짧을 수밖에 없는 단점이 있고, 이렇게 되면 오랜 시간 투자할 만큼 가치가 있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어쩌면 그래서 에픽스토어에서 1년 동안 무료로 풀었는지 모르지만.

하지만 이 게임의 제목이 ‘슬러지 라이프’가 아닌가? 본인처럼 오랜만에 B급 감성을 느껴보고 싶다거나, 전혀 새로운 느낌의 게임을 해 보고 싶다면 최소한 게이머의 시간을 낭비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일부 아이템들은 찾아가는 과정의 아이디어가 그럴 듯해서 절로 고개가 끄덕이는 경우도 많았다. 담배를 피우거나, 농구공을 던지고, 일부러 추락사한 다음에 생각지도 못 한 아이템을 획득하는 등 개발진의 철학대로 짓궂은 점들이 자주 보인다. 생전 처음 듣는 유머와 기괴한 조각들을 찾아가는 과정이 이 게임 안에 있다. 슬러지 라이프는 여러모로 독특한 게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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