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싱은 '멋'이 아닌 '안전', PC 'WRC 9' 리뷰

  • 입력 2020.11.10 12:50
  • 기자명 더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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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머마다 최고로 내세우는 장르는 각각 다르다. 어떤 게이머는 '오픈 월드' 형태의 RPG를 최고라 여기고, 또 어떤 게이머는 1인칭 슈팅 게임을 정점이라고 말한다. 사실 옳다 그르다의 문제를 떠나서 시대의 기술력과 게임사의 역량을 단순히 장르 하나만으로 평가할 순 없다.

 

현실에서 쉽게 경험할 수 없는 기회인 '자유도'를 높게 평가할 수도 있고, 반대로 최대한 현실과 비슷한 환경의 '현실성'을 우선으로 꼽을 수도 있다. 어떤 것이든 '게임'이라는 하나의 범주에 묶을 순 있지만, 게이머마다 '에이 그건 게임이라고 보기 어렵지'라고 생각하는 장르가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시뮬레이션'의 색깔을 강하게 내뿜는 장르를 그렇게 생각한다. 특히나 최근 몇 년 각종 '시뮬레이터'라는 이름을 달고 조악한 그래픽과 조작법을 그럴싸하게 포장한 몇몇 게임들. 이런 어설픔과 불편함이 마치 이 장르에서는 허용될 수 있는 독특한 재미이자 '밈'처럼 여겨지는 것에 쉽게 동의할 순 없다.

 

'시뮬레이션' 장르에도 어느 정도의 서열, 그러니까 '급'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수준에 있는 것이 '비행기'이고, 다음이 '자동차'라고 생각한다. 이 둘을 꼽은 이유는 전문적인 수준의 지식이 필요하고, 현실과 비슷한 환경을 체험할 수 있는 별도의 어트랙션 장비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 때문이다. 

 

사실, '게임'보다는 일종의 새로운 '지식'을 얻는 즐거움에 더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게이머마다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 이런 '시뮬레이션' 장르는 '새로운 지식을 얻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에 바탕을 둔 높은 수준의 쾌락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비행기' 조종의 꿈은 빠르게 접었으나, 최근 새로운 재미를 발견한 분야가 있다. 바로 '레이싱' 이다. 지금껏 단순히 '범퍼카' 수준의 '아케이드 레이싱' 게임만을 즐기며 '역시 부스터를 써야 제맛이지' 라고 자신 스스로를 가둬왔다. 그러다 만나게 된 게임이 바로 '유로 트럭 2'다. 그 '멋없는 잔잔함'에서 '시뮬레이션'의 잔잔하고 깊은 맛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이번 리뷰는 '유로 트럭 2'보다는 조금 더 난이도 있는 레이싱게임이다.

 

레이싱 시뮬레이션에도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서킷을 달리는 '포뮬러 원', 다른 하나는 아스팔트뿐만 아니라 눈길, 사막, 자갈밭 등의 다양한 땅 위를 달리는 '랠리'다. 이 '랠리 레이싱'를 게임으로 담아낸 'World Rally Championship 9' 이다.

'WRC 9'는 실제 현실의 물리법칙을 최대한 적용한 '시뮬레이션 레이싱'이다. 그만큼 '범퍼카'의 주행 방식에 익숙한 게이머라면 적응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제대로 방향을 잡는 것을 물론, 코너를 돈 후에 제대로 중심을 잡는 것에도 기술이 필요하다. '알아서 해주겠지'가 아니라 '제대로 된 상태로 만드는 과정'이 게임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코너에서 빙글빙글 돌거나, 가드레일을 긁고 튕겨 나가다 보면 '시뮬레이션'의 야속함에 질려 금방 게임을 관두게 된다. '시뮬레이션 레이싱'의 불친절함과 '이 정도는 할 줄 알아야지' 하는 게임 진행 방식은 '뉴비'들에겐 높은 진입장벽처럼 느껴진다.

 

'WRC 9'은 최대한 현실의 랠리를 그대로 게임에 녹여냄과 동시에, 새롭게 진입한 뉴비들을 위한 친절함도 준비했다. 우선 자동 변속은 기본으로 지원하고, 'ABS'나 'TCS' 같은 전자 장비 어시스트를 쉽게 켜고 끌 수 있다. 초보 게이머 입장에서는 신경 써야 할 부분이 상당히 많이 줄어드는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게임의 난이도가 급격하게 변하는 것은 아니다. '아케이드 레이싱' 처럼 벽에 차체를 긁으면서 코너를 도는 방식, 일정 구역을 가로지르면서 부스터를 켜는 방식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가장 먼저 적응해야 할 것은 바로 '페이스 노트'다.

 

'WRC 9'은 미니맵이 없는 대신 조수석의 파트너가 경로를 알려주는 '페이스 노트'를 알려준다. 이를 확인하고, 예측해야 한다. 언젠가 차량의 보닛이 열려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지도와 파트너의 지시만 듣고 주행하는 동영상을 본 적이 있다. '저게 되나'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실제로 게임의 환경을 경험해보니 상당히 정확하고 자세하다.

 

단순히 '전방에 좌회전입니다'의 내비게이션 수준이 아니다. 앞으로 거리는 얼마나 남았는지, 코너의 각도는 어느 정도 인지, 도로의 폭은 어떻게 변화하는지, 노면 상태는 어떤지를 빠짐없이 알려준다. 영어로 알려주는 것이 아쉽긴 하지만,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쉬우니 몇 번 듣다 보면 적응하게 된다.

'WRC 9'은 다양한 연습을 통해 '랠리 레이싱'에 적응할 시간을 거쳐야 한다. 이 과정에서 '알아서 적응해'라는 방식이 아니라 '시뮬레이션 레이싱'을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또 어떻게 적응해야 하는지를 최대한 친절하게 알려준다. 기존의 '아케이드 레이싱'과는 다른 방식이라는 점을 차근차근 하나씩 배울 수 있어 많은 도움이 된다.

 

특히 난이도를 조절할 수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난이도는 50%에서 100%까지 조절을 할 수 있어, 게임의 숙련도가 오르면 성향에 맞춰 세밀하게 조절할 수 있다. 여기서 난이도는 어떤 보정 값을 조절하는 것이 아니다. 함께 경쟁하는 다른 AI들의 기록 시간과 플레이어가 받을 수 있는 경험치나 보상에 영향을 주는 정도다.

 

게임 엔진을 건드리는 정도는 아니지만, 이 정도의 어드밴티지는 상당히 많은 도움이 된다. 특히 게임의 초반, 전반적인 랠리의 방식에 적응하면서 어렵지 않게 우승을 하다 보면, 게임의 재미를 조금씩 느낄 수 있다. '나도 1등을 할 수 있구나' 하는 자신감 같은 것이 생긴다. 

'어차피 잘 달리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는 뉴비들은 'WRC 9'의 일정 진행방식에 조금 당황할 수도 있다. 단순히 '랠리' 뿐만 아니라 '매니지먼트'도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플레이어는 드라이버의 역할과 함께 팀을 운영하는 책임자의 역할도 같이 해야 한다.

 

팀을 운영하기 위해선 다양한 인원이 필요하다. 여기에서는 모바일 게임이나 스포츠 게임의 '선수 뽑기'와 같은 느낌이 난다. 하나의 크루에는 총 6가지 전문 분야로 나뉘고, '엔지니어' '재무 담당자' '기상학자' 등 각각의 분야마다 고유의 스킬을 가지고 있다. 지정할 수 있는 크루는 '희귀도'에 따라 능력치의 차이가 있다.

 

크루를 고용하면 다가올 레이싱에 많은 도움이 되지만, 능력치만큼 고정 비용이 지급된다. 그리고 고용한 크루는 일정이 지나면서 체력이 소모되므로, 적절한 시기에 휴식을 보장해줘야 한다. 당연히 예비 인원을 고용할 수도 있다. 여기서 기존의 크루를 고용해 숙련도를 올릴 것인지, 아니면 적당한 때에 서브 인원을 채용할 것인지는 플레이어가 결정해야 한다.

 

인원 활용만큼 중요한 것이 바로 '연구 개발'이다. 차량과 플레이어의 레이싱 팀을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는 '연구 개발'은 커리어를 진행하면서 얻는 레벨업 보상으로 잠금 해제 할 수 있다. 종류는 팀, 크루, 차량 성능, 안정성 등의 4가지로 나뉜다. 초반에는 차량 자체의 능력보다는 팀이나 크루의 영역에 투자하는 것이 좋다.

'랠리'란 단판으로 우승을 겨루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레이싱에서 획득한 포인트를 합산해서 1위를 뽑는 방식이다. 어찌 됐든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1등만 하면 장땡이 아니다. 거리에서 아이템을 먹거나, 혹은 주유소에 들어가서 부서진 차량을 회복하는 아케이드 레이싱과는 다르게 'WRC 9'은 모든 경기 후 차량을 수리하는 시간이 있다. 이 말은 결국 최상의 차량 컨디션을 위해선 '비용'이 든다는 뜻이다. 

 

'메니지먼트' 게임을 즐기는 게이머라면 알 것이다. 하나의 팀을 운영하는 것의 중심은 결국엔 '자본' 이다. 'WRC 9'역시 철저하게 자본을 따른다. 각각의 랠리가 끝난 후에는 그동안 아무 생각 없이 벽을 박고 뒤집어진 대가를 치러야 한다.

 

'엔진'과 '브레이크'부터 '기어박스' '범퍼' '헤드라이트' 등 10가지가 넘는 부품들을 이때 수리하거나 교체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비용이 드는 것뿐만 아니라 시간 페널티도 부여된다는 점. 즉, 돈이 있다고 모두 수리할 수는 없다. 각각의 부품에 드는 수리 시간은 각각 다르다. 게임에서는 총 45분의 시간으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수리에 드는 시간 역시 잘 활용해서 꼭 필요한 부품부터 먼저 수리해야 한다. 이 시간을 넘길 경우엔 시간 페널티가 따로 부여된다.

'우승도 못 하고, 어렵게 번 상금은 직원들 월급이랑 수리비로 다 나가는 데 차는 언제사?'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이런 걱정은 제조사와의 관계를 쌓아가면서 해결할 수 있다. 'WRC 9'은 스폰서와의 관계도 중요하다. 일정에서 '제조사 테스트' 이벤트를 선택하면, 자신의 명성을 높일 수 있다. 차를 대여해준 제조사에 대한 명성이 높아지면 새로운 계약을 맺을 수 있는 것.

 

'제조사 테스트'는 빌려온 차량을 운전하며, 할당된 시간 내에 최대한 많은 트랙을 주행하는 것이 목적이다. 각각 제조사의 차량을 미리 주행해 볼 수 있고, 보상도 얻을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참여하는 것이 좋다. 'WRC 9'에서는 모든 활동이 레벨업 포인트로 연결되는 만큼, 크게 손해를 보는 경우는 없다. 다양한 차량을 경험해보고, 자신이 좋아하는 브랜드와 협력하고 싶다면 '테스트'를 우선으로 생각하는 것도 방법이다.

'WRC 9'은 경쟁자의 자동차를 뒤에서 받거나, 앞을 가로막아 터트리는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 소위 말하는 '멋' '간지 나는' 주행은 없다. 겉으로 보기엔 얌전해 보이고, 조심스러운 소심함이 느껴진다. '충돌이 곧 브레이크' 라고 여기던 '아케이드 레이싱' 게이머에겐 상당히 낯선 경험이 될 것이다. 브레이크 우선의 그 느림의 미학과 조금씩 줄어드는 기록과 제대로 된 커브에서 느낄 수 있는 절제된 재미는 '부스터'나 '드리프트'와는 또 다른 맛이다.

 

아쉬운 부분도 남는다. '랠리' 역시 어쩔 수 없는 스포츠다 보니 매년 뒷자리의 숫자만 바꾸는 방식에서 자유로울 순 없다. 'WRC 9' 역시 전작인 'WRC 8'과 크게 개선된 부분이 없다는 점은 신작 구매를 망설이게 하는 요소다. 기존의 팬 입장에서는 단순히 숫자만 바꾼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WRC 9'은 기존 팬보다 새롭게 이 장르를 경험해보고자 하는 뉴비에게만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시뮬레이션 레이싱'에 대한 자신감을 얻을 수 있고, '멋'이 아닌 '안전'의 뜻이 어떤 것인지를 배울 수 있다. 그동안 멀게만 느껴졌던 '랠리 레이싱'이 어떤 것인지 경험해보고 싶다면 'WRC 9'은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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