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데스(Hades), 로그라이크 역사의 새로운 이정표
하데스(Hades), 로그라이크 역사의 새로운 이정표
  • 진병훈
  • 승인 2020.09.25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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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 자이언트 게임스(Supergiant Games)는 그동안 풍부한 내러티브와 정교한 테마로 게임을 제작해 왔다. 국내 게이머들에게는 액션 RPG <베스천(Bastion)>이 유명하겠지만, 해외 팬들 사이에서는 이미 <파이어(Pyre)>와 <트랜지스터(Transistor)>로 눈도장을 찍어 놓은 상태였다. 이번에 출시한 <하데스(Hades)>는 그간 쌓인 노하우에 ‘로그라이트(Roguelike)’ 장르를 완벽히 흡수시키면서 놀라운 결과물을 만들어 냈다. 외형적으로는 캐릭터들간의 상호 작용이 반복되는 것 같지만, 매우 중요한 플롯 장치가 되었으며 놀라운 전투 시스템과 동시에 통찰력 있는 스토리텔링을 경험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 게임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패드를 놓을 수 없게 만드는 어마어마한 텍스트량에 있다.

그간 하데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비교적 외면 받는 존재였다. 그의 형제 제우스, 포세이돈과 함께 크로노스와 티탄 족에 맞서 싸워 하계(타르타로스)의 지배권을 얻었지만, 올림푸스 12신에 속하지도 않았고, 헤라클레스와 테세우스, 이아손라는 걸쭉한 영웅들 때문에 각종 인문학 저서에서 밀리는 신세였다. 죽은 자의 혼이 가는 나라, 명계라는 곳을 지배하는 그 엄격함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이름대로 ‘눈에 보이지 않는 자’를 의미한 탓인지, 결코 사악하거나 부정한 신이 아닌데도 대부분의 문학 세계에서는 그를 악의 상징으로 묘사했다.

슈퍼 자이언트 게임스는 아이스킬로스의 <그리스 비극>에서 그 실마리를 찾은 것으로 보인다. 이 게임의 주인공인 자그레우스는 첫 번째 디오니소스이자 ‘영혼의 사냥꾼’, ‘잔인한 사냥꾼’ 등 그 별칭이 많은데 <그리스 비극>에서는 ‘지하의 제우스’로 부르며 하데스와 동일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로는 제우스가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 사이에서 페르세포네를 딸로 낳았고, 그 미모에 반해 페르세포네마저 탐한 탓에 자그레우스가 태어난 것이었다. 질투에 눈이 먼 헤라가 보낸 티탄에게 잡아먹힌 자그레우스는 두 번째 디오니소스로 환생한다.

이제 자그레우스는 타르타로스의 왕자로 태어났다. 분노는 간신히 통제된 채 아버지 하데스의 충고를 무시하고, 무조건 지상으로 향하는 것이다. 하늘과 지면만큼 끔찍한 거리의 타르타로스를 지나서 선과 악도 존재하지 않는 아스포델과 유토피아로 알려진 엘리시움을 통과해 스틱스 신전까지 도달한다. 그 과정에서 겪는 하데스와의 갈등은 친숙한 그리스 신화로 이어진다. 이 끝을 알 수 없는 행보에서 드디어 할 일이 생기게 되고, 위압적인 아버지와 충돌하기 시작한다.

게이머는 자그레우스의 환생을 목도하면서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어머니의 존재를 알게 되고, 아버지 하데스뿐만 아니라 발벗고 나서 도와주는 올림푸스 신들을 의심하게 될 것이다. 이 게임에서 죽음이란 단순히 로그라이트 장르를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라 잘 짜인 이야기 역학의 한 구조를 들여다보게 된다.

에리니에스 자매는 ‘광폭한 여신들’답게 자그레우스의 발목을 잡으려 한다. 처음에는 하데스의 명령으로 길목을 막아서지만, 당신에게 죽을 때마다, 혹은 실패할 때마다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면서 전투를 반복하려 든다. 메가이라는 그래도 대화라도 통하지만, 당신이 죽인 언데드의 횟수가 불어나면서 등장하는 알렉토와 티시포네는 오로지 처벌과 심판에만 의지한다. 메가이라와의 첫 전투에서부터 실패한다면 에리니에스 자매의 놀림감이 될 것이고, 실력을 유감 없이 발휘해 돌파를 지속한다면 적대감을 숨기지 않을 것이다. 이 일련의 과정은 테세우스와 아스테리우스(미노타우로스)와의 접전에서도 이어진다. 특히 크레타의 왕 미노스의 탐욕으로 태어난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것으로 유명한 테세우스의 끊임없는 수다는 그 명성만큼 흥미롭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인물, 하데스는 단순히 부자 관계가 아니라는 점을 확인시켜 준다. 게이머는 마치 <데빌 메이 크라이>시리즈처럼 스타일리시한 액션 쾌감을 즐기면서도 죽음과 환생이 반복되길 바랄 수도 있다. 실패하면 실패할수록 하데스와 어머니의 비밀에 조금씩 근접하게 되고, 밤을 의인화한 여신 닉스의 조언은 스틱스 신전으로 향하는 동기부여가 된다. 트로이 전쟁의 위대한 영웅, 아킬레오스는 대련과 관련된 조언과 함께 전쟁과 역사의 기록이 담긴 고서를 전달한다.

전투는 매우 빠르게 진행된다. 주로 대시로 회피하면서 업그레이드된 공격을 퍼붓는데 정밀하고 신중한 관찰이 요구되는 적들을 만나면 광란에 가까운 속도전이 시작된다. 이것은 하나의 흐름처럼 인식될 수 있고, 유토피아와 같은 휴식처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기적으로 잠금 해제되는 무기들은 적의 심장부에 화살을 박아버릴 수 있는 코로나코트와 근접전에 최적화된 쌍둥이 주먹 말폰까지 다양하다. 인상적인 점은 올림푸스 신들의 메시지에 따라 무기와 마법, 기타 능력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데 동일한 무기를 들고 있어도 새로운 공격 스타일을 계속해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게이머는 죽음으로써 어떤 공격 스타일이 효과적인지 학습해야 하며 역시 여기에도 강력한 이야기가 따라온다.

이 풍부한 콘텐츠는 거의 절대적이었다. 본인이 스무 번을 죽으면서 경험한 건 유기적으로 연결된 대사들이었다. 무기와 전투 시스템을 대충 파악해도 질리지 않았던 이유는 강물처럼 자연스럽게 흐르는 이야기 덕분이었다. 올림푸스의 신들 뿐만 아니라 잠이 의인화된 신 히프노스, 아킬레우스의 친구 파트로클로스, 코린토스의 왕 시시포스, 죽음을 의인화한 신 타나토스 등은 게이머가 누구 때문에 환생했는지 정확히 짚어낸다.

이 게임의 액션 시퀀스 사이에 스며드는 이야기들은 훌륭하지만, 시시포스에 비유될 정도로 관심이 줄어드는 측면도 있다. 게임에서도 등장하는 시시포스는 에피레의 창건자로 아이올로스의 자식이었다. 제우스의 비밀을 폭로한 죄, 그리고 형제 살모네우스에게 원한을 품고 그의 딸을 범한 죄가 있었던 그는 타르타로스에서 경사가 급한 고개로 바위를 밀어 올리는 벌을 받게 된다. 정상에 다다르면 바위가 굴러 떨어지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 벌을 받는 것이다.

게임에서는 인심 좋은 아저씨 정도로 등장하는데 그를 만날 즈음이면 엘리시움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을 것이다. 본인 역시 스무 번을 죽는 동안 엘리시움의 길목을 지키고 있던 테세우스와 아스테리우스 앞에서 번번히 실패했다. 그들이 강한 이유도 있지만, 이른바 ‘영혼 포획자’로 불리는 잡몹들의 방어구가 두꺼운 탓도 있다. 빠른 스피드를 자랑하는 잡몹들은 에너지가 고갈되더라도 영혼으로 풀려나고, 시간이 지나면 다시 체력을 회복하기 때문에 매우 까다로운 종자들이다. 그렇게 실패를 거듭하고 나면 업그레이드의 중요성을 깨닫고, 호기심으로 접했던 올림푸스 신들을 가려서 만나게 될 것이다. 결국 핵심은 최초로 선택한 공격 스타일을 고집하고 집중해야 한다. 이 게임은 ‘핵 앤드 슬래시(Hack and slash)’ 장르의 최고점을 찍을 정도로 빠르고 재밌지만, 언젠가는 인내심에도 한계를 느끼게 된다. 게다가 타르타로스의 길목을 막았던 에리니메스 자매가 번갈아 가며 매서운 공격을 퍼붓는다. 살인자를 부르짖으며 맹렬히 달려드는 티시포네를 보고 있으면 첫 전투에 임했던 메가이라가 그리울 정도다. 아스포델을 지키고 있는 ‘레르네의 뼈 히드라’ 역시 공격 패턴을 다양하게 바꾸는데 대시 방향을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골치가 아파진다. 결국 동일한 패턴과 동일한 장소에서 계속해서 죽을 수 있다는 점이 이 게임의 최악의 난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게임은 강력한 이야기의 흐름 덕분에 로그라이크 장르를 새로 개척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게이머가 모든 무기 스타일을 터득하고, 하드코어 모드를 개방하게 되면서부터 그다지 할 일이 없게 된다. 결국 레벨 디자인의 한계와 적은 볼륨 탓이다. 물론 마니아들은 더 많은 보상을 위해, 그리고 하데스의 비밀에 조금 더 접근하기 위해 수십 시간씩 소비하겠지만, 결국 난이도 조정을 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놀랍게도 자그레우스의 이야기는 좀처럼 끝이 나지 않는다. 분명히 게임 스테이지를 전부클리어한 것 같지만, 올림푸스의 신들은 계속해서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이는 하데스 역시 마찬가지다. 모두에 언급한 것처럼 이 어마어마한 대사량의 끝이 어디인지 예측하기 힘들 정도다. 진지하게 임하지 않거나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다면 이 게임의 스토리텔링을 완벽히 접했다고 볼 수 없다.

가장 헌신적인 게이머만이 <하데스>가 제공하는 모든 볼륨을 통달할 것이다. 죽어도 죽어도 다시 환생해서 비밀을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자그레우스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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