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언 하베스트(Iron Harvest), RTS의 전설을 잇는 야심작

  • 입력 2020.09.08 12:24
  • 기자명 진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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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언 하베스트(Iron Harvest), 이른바 철의 수확이라고 불리는 이 타이틀은 디젤 엔진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욱한 연기와 귀를 찢는 듯한 금속성 소리를 오랫동안 감내해야 한다. 군인들 사이에서 총과 폭탄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수십 미터에 달하는 이족 보행 병기가 물리적 환경을 거침없이 파괴한다. 짙은 기름 냄새 뒤에는 불규칙적으로 움직이는 피스톤 소리가 전장을 지배하고 있다.

이 지독한 광경을 뚝심 있게 지켜볼 자신이 있다면 아이언 하베스트는 게이머에게 있어서 최고의 작품이 될 것이다.

폴란드 태생의 아티스트가 제작한 보드 게임, <사이쓰(Scythe)>의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는 이 게임은 RTS, 더 솔직히 말하자면 <스타크래프트><커맨드 앤 컨커> 시리즈의 영광을 돌아보게 한다. 그런 면에서 King Art Games 개발진의 야망이 심상치 않다. 그들은 21세기에 접어들기 전부터 시작된 RTS 전성기를 기억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독창적인 게임성을 창조했다.

이 게임의 전략은 공격과 방어의 균형 감각이라고 할 수 있다. 벽이나 진지, 모래주머니로 엄폐를 하는 기능은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 시리즈와 유사하지만, 단지 컨트롤만이 능사가 아니다. 리소스 포인트에서 생산과 수리 및 업그레이드를 하면서 어떤 유닛이 필요한지 판단하는 것은 이전 RTS와 비슷하지만, 제한된 생산력 안에서 유닛의 역할 분배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각 유닛마다 레벨이 존재하고 있고, 베테랑 등급이 되면서 특수 기술이 개방되기도 하기 때문에 수리 및 치유가 매우 중요하다.

단적으로 예를 들면 병영에서 보병을 생산하면 다섯 명이 투입되는데 전투 중에 체력이 깎이면서 일부가 사망할 수 있다. 하지만 거리에 널려 있는 의료 도구를 얻게 되면 다섯 명이 새로 투입될 수 있다. 한두 명에서 다섯 명으로 불어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병영에서 생산하는 것보다 치유와 수리하는 쪽이 더 효율적인 것이다.

상황에 따라 다른 무기를 얻으면서 공병, 척탄병, 경기관총병, 화염방사기병, 의무병 등으로 역할을 바꿀 수도 있다. 단순한 보병이 화염방사기를 얻게 되면 그때부터는 화염방사기병이 되는 것이다. 적들이 무기를 드롭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극적인 상황에서도 매우 유용하게 작용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 게임의 자원이 사치를 부리는 건 아니다. 일부 캠페인 미션에서는 살인적인 생산량으로도 살아남아야 한다. 넓은 지도 안에 숨어 있는 아군을 발견하거나 게이머와 무관하게 생산되는 NPC 아군들을 적절히 활용해야 할 때도 있다.

보병에 특화된, 또는 기갑에 특화된 유닛을 적절히 생산해서 재분배하는 과정까지 그리 간단치 않다. 이 게임은 속전속결로 끝낼 수 있는 미션이 없다. 도처에 위치한 철광산과 석유 펌프까지 향하는 길도 기나긴 행군에 가깝기 때문에 시간이 지체되면서 심신이 지칠 수 있다. 기갑들이 지나치게 느린 이유도 있지만, 적들의 이동 경로나 공격 패턴이 워낙 다양해서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면서 전략과 전술을 새로 짜야 한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적들이 파상 공세로 공격을 퍼부어도 막아낼 여지는 충분히 주어진다. 필요한 건 인내와 끈기, 그리고 시간이다.

이 게임은 1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시점을 배경으로 한 대체 역사(그래서 1920+라는 부제도 붙었다) 장르지만, 니콜라이 2세와 그리고리 라스푸틴처럼 실존했던 인물도 포진해 있다. 루스비에트 연방의 영웅이 니콜라이 2세의 여동생 이름과 비슷하다는 건 우연이 아니다. 루스비에트 연방은 폴라니아 공화국, 작센 제국과 함께 이 게임의 진영 중 하나다. 모두 실제 국가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작센 제국은 독일과 프로이센을 모티브로 하고 있는데 사이쓰 세계관에서는 전쟁 패배 이후 굴욕적인 강화 조약을 맺은 것으로 묘사된다. 러시아제국과 소비에트 연방을 모티브로 한 루스비에트 연방은 사회주의 기운이 감도는 탓인지 근접 공격에 특화되어 있다. 보병은 산탄총을 들고 있으며 이 진영의 영웅인 올가 로마노바는 호랑이를 소환하는 특수 기술이 있다.

어쩌면 이 게임의 연합군 정도로 인식될 수 있는 폴라니아 공화국은 폴란드를 모티브로 했다. 실제 역사에서도 소련과 독일 사이에서 압박을 받은 탓인지 게임의 스토리에서도 컷신 대부분이 절절한 편이다. 폴라니아 공화국의 영웅, 안나 코스의 이야기만 봐도 감정이입이 충만하게 구성되어 있다. 애완용 곰 보이테크와 함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시민들을 구하고,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탈출로를 만들려는 활약, 거기에 가혹한 전쟁 속에서 극단적인 신념에 빠져 버린 삼촌, 그리고 전쟁에 지친 당국과 자주 충돌한다. 근본적인 문제는 좀처럼 길을 찾지 못하는 자신의 가치관에 있다. 그녀는 잔악무도한 루스비에트 연방과 사투를 벌이지만, 무엇이 전쟁을 막는 길인지 혼란스럽게 된다.

이 세 진영의 이야기는 교묘하게 짜여져 있는 편이고, 결론으로 이르는 과정이 꽤 서사적이다. 영웅들은 신념이 강하고, 갖가지 가치와 충돌한다. 이들이 만들어 내는 전쟁은 우여곡절로 가득차 있다.

이미 눈치챘겠지만, 디젤 펑크 장르의 미학도 돋보인다. 이 게임 역시 진보를 전제로 한 과학과 기술이 산업혁명 시대와 충돌하는 방식을 선호하고 있다. 이 세 진영 사이에서 핵심이 되고 있는 대형 병기가 바로 그것이다. 전쟁과 이념이 상징적으로 묘사되면서 차갑고 건조한 이미지도 드러나며 공산주의와 빈부 격차가 갈등 요소로 자리잡은 것 역시 디젤 펑크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다.

디젤 펑크가 사이버 펑크에 이어 스팀 펑크 장르에서부터 파생됐다는 점이 흥미롭다. 모두 알고 있듯이 사이버 펑크는 컴퓨터 기술에 의해 지배당하는 사회를 묘사하는 SF 장르이다. 이들 장르 문학을 살펴보면 어둡고, 불쾌하며 방황과 절망감이 가득해 있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1982)>는 시종일관 쏟아지는 네온사인의 불빛과 칠흑 같은 밤을 대조시키면서 디스토피아의 새로운 세계관으로 묘사했다. 스팀 펑크는 산업혁명이 발달하던 19세기 전후 세계를 배경으로 SF적인 요소를 도입한 장르이다. 이들 장르는 대체 역사물로 대중 앞에 선보였고, 증기 기관을 앞세워 복고적인 매력을 혼합시켰다.

이 게임의 원작이라고 할 수 있는 사이쓰는 폴란드의 시골 마을을 풍경으로 거대한 디젤 엔진 기계를 등장시켰다. 농사를 짓는 주민들 뒤로 나타나는 이족 보행 병기와 이를 지켜보는 폴라니아 연방의 영웅 안나 코스의 스케치는 꽤 인상적이다. 개발진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최초의 탱크, 비행기, 개선된 무기보다는 세계의 메인 무대를 차지한 것은 디젤 엔진 기계라고 자신있게 말한다.

문제는 캠페인 시나리오가 지나치게 장기전이라는 점에 있다. 핵심 요소로 꼽는 대형 병기가 하나같이 거북이처럼 움직일 뿐만 아니라 승패에 있어서 확실한 정답도 아니기 때문이다. 나중에 지도가 더 방대해지면 이동 시간만 5분 이상이 걸릴 때도 있다. 엄청난 자원을 먹는 이 대형 병기들이 보병 서너 명이 조정하는 박격포에 쉽게 무너지게 되면 이 전장의 끝이 어딘지 가늠할 수 없게 된다.

게이머들은 상대적으로 전술이 중요한 <스타크래프트>를 떠올리면 낭패를 볼 것이다. 이 게임은 마우스를 움직이는 속도보다는 각 유닛의 적절한 배치가 우선시된다. 유닛들을 진군시킨다는 것은 자신들의 목숨뿐만 아니라 본거지, 그리고 자원에 해당하는 철광산과 석유 펌프의 안위까지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비장한 각오가 필요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게임의 백미는 대형 병기에 있다. 수십 미터에 달하는 이족 보행 병기가 지나가면 견고해 보였던 건물들이 가볍게 파괴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일부 건물들이 파괴되면서 유리한 고지도 점령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대형 병기들의 묵직한 행군은 꼭 필요한 부분이다. 일부 기갑들은 어색한 움직임을 보이지만,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는 배기가스와 기름진 비주얼은 이러한 비논리적인 모순을 멋지게 포용한다.

반면 멀티 플레이는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고 할 수 있다. 여타 RTS처럼 자원을 획득하고 건물을 지을 수 있으며 적 본거지를 파괴해서 승리해야 한다. 벙커와 지뢰를 설치할 수 있지만, 속도전에는 어울리지 않아 추천하지 않는 편이다. 멀티 플레이는 캠페인과는 달리 전술이 상대적으로 중요하다. 엄폐도 중요하지만, 체력 관리도 필요해서 초반 승패를 좌우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빠른 공격을 하는 쪽이 승리를 거머쥘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

아이언 하베스트는 RTS 장르의 고전적인 답습이지만, 매우 반가운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장르적인 재미가 뒤늦게 따라오거나 대형 병기들의 애태우는 모션이 거슬리지만, <스타크래프트><커맨드 앤 컨커> 시리즈를 잇는 야심작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특히 전쟁과 이념을 묘사하는 스토리텔링도 훌륭한 편이기 때문에 개발진의 미래도 밝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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